전기차 사용후 배터리 발생량은 빠르게 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집계로 2025년 국내 배출량은 8,321개였고, 2030년에는 연간 10만 7,500개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 전망치도 어디까지나 예측이며, 과거 전망이 실적과 크게 어긋났던 전례가 있다는 점은 뒤에서 공급량 변수로 다시 짚는다. 이 배터리를 어디에 다시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 지금까지 나온 답은 거의 하나로 수렴한다. 에너지저장장치(ESS)다. 재사용 배터리 사업을 검토하는 쪽에서는 왜 ESS 말고 다른 용도는 잘 보이지 않는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를 궁금해한다. 이 글은 그 질문에 사용처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용후 배터리가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에서 출발해 답한다.
사용후 배터리는 무엇이 달라진 상태인가
전기차에서 탈거된 배터리는 새 배터리와 성능이 같지 않다. 정부가 2027년 시행을 목표로 준비 중인 탈거 전 성능평가 제도는 이 차이를 세 축으로 본다. 성능(잔존용량), 안전성(셀전압편차), 이력(정비·검사·리콜 여부)이다. 이 세 축을 그대로 사용후 배터리의 특성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잔존용량이 떨어져 있다. 전기차가 요구하는 주행거리와 출력을 더는 만족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내려간 배터리이므로 탈거된 것이다. 둘째, 셀 간 편차가 커져 있다. 제조 단계의 미세한 저항 불균형이 사용 기간 동안 충방전이 반복되면서 벌어진다. 셋째, 이력이 균일하지 않다. 차량마다 주행 패턴, 정비 이력, 사고·리콜 여부가 달라 같은 모델이라도 배터리 상태가 제각각이다. 다만 이 세 가지 저하가 배터리를 못 쓰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내부에는 여전히 상당한 에너지 저장 능력이 남아 있고, 이 잔존 능력이 재사용의 근거가 된다.
특성에서 판별 기준으로
이 세 특성을 용도 선택의 기준으로 옮기면 세 가지 질문이 남는다.
- 이 용도는 전기차만큼 높은 출력과 에너지밀도를 순간적으로 요구하는가, 아니면 완만한 충방전으로 충분한가.
- 이 용도는 배터리 상태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셀 편차를 관리할 수 있는 고정된 환경인가, 아니면 사람이 휴대하거나 이동하며 쓰는 환경인가.
- 이 용도는 사용후 배터리팩을 모듈 단위로 재구성해 넣을 수 있는 구조인가, 아니면 소형·경량화를 위해 다시 분해해야 하는가.
세 질문에 낙관적으로 답할수록, 즉 저출력이고 고정된 환경이며 팩 단위 재구성이 가능할수록, 사용후 배터리를 안전하게 넣을 수 있는 용도에 가깝다. 이 기준에서 ESS는 세 질문 모두에 유리한 답을 내놓는 용도 중 하나다.
ESS가 먼저 자리잡은 이유
ESS는 정지 상태에서 충방전을 반복하는 설비다. 전기차처럼 급가속이나 급제동에 대응하는 순간 고출력이 필요하지 않다. 발전소나 산업단지처럼 접근이 통제된 장소에 고정 설치되므로 배터리관리시스템(BMS)으로 셀 편차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관리할 여지도 크다. 정부의 분류 기준은 탈거 전 성능평가 결과에 따라 재제조와 재사용을 서로 다른 활용 등급으로 나누는데, 이 중 재사용은 “에너지저장장치 등 기타 용도로 재조립"으로 정의된다. 부속품을 교체·수리해 전기차 배터리로 되돌리는 재제조와 달리, 재사용은 팩이나 모듈 단위를 유지한 채 용도만 바꾸는 쪽에 가깝다. ESS는 이 재사용 방식과 잘 맞는 용도다.
여기에 지원 정책도 ESS 쪽으로 먼저 조성됐다. 산업통상자원부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받아 2021년부터 시작된 현대자동차그룹·한국수력원자력·OCI 등의 실증사업은 울산공장 태양광 발전소에 2MWh급 재사용 ESS를 연계했고, 이후 3GWh급 재사용 ESS 보급사업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판별 기준에서 유리한 조건과 정책 지원이 겹치면서 ESS가 먼저 규모를 키웠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용도는 왜 아직 규모가 작은가
같은 기준으로 보면 다른 용도가 더딘 이유도 설명된다. 2023년 3월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전안법) 개정으로 재사용전지에 대한 안전성 검사 제도가 그해 10월부터 시행되면서, ESS 외에도 캠핑용 파워뱅크(굿바이카), 농업용 고소작업차(대륜엔지니어링), 스마트 태양광 가로등(솔루엠) 같은 실증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 용도는 판별 기준의 첫 번째 질문(저출력)은 대체로 만족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서 ESS보다 조건이 나쁘다. 파워뱅크는 사람이 휴대하는 기기라 지속 모니터링이 어렵고, 고소작업차나 가로등은 옥외·이동 환경에 놓여 온도와 진동 조건이 ESS보다 불리하다. 소형화를 위해 팩을 다시 분해해 재구성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ESS처럼 모듈 단위를 그대로 살리기 어렵다. 안전 인증 체계가 갖춰진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 아직은 개별 실증사업 단계이고, ESS만큼의 규모의 경제에 이르지 못했다.
판별 기준을 통과하는 것과 별개로,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도 규모를 가르는 변수다. 2023년 환경부가 전안법 개정을 발표하며 내놓은 전망에서는 2025년 사용후 배터리 배출량을 3만 1,700개로 예상했다. 그러나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집계한 2025년 실제 배출량은 8,321개로, 당시 전망치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파워뱅크나 고소작업차, 가로등처럼 개별 기업이 특정 용도에 맞춰 사업을 설계해도, 그 용도가 필요로 하는 물량이 예측보다 늦게 쌓이면 양산 투자를 결정하기 어렵다. ESS는 상대적으로 한 프로젝트가 소화하는 물량 단위가 크고, 여러 팩을 묶어 셀 편차를 흡수할 여지도 있어 물량이 예상보다 더디게 늘어나는 국면에서도 사업을 유지하기가 다른 용도보다 수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ARC의 관찰
용도가 ESS에 쏠린 현상은 시장이 다른 가능성을 못 봐서가 아니라, 사용후 배터리의 특성이 정지형·저출력·팩 단위 재구성이 가능한 용도에 먼저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파워뱅크나 고소작업차, 가로등 같은 실증 사례가 이미 나와 있다는 점은 판별 기준을 만족하는 용도가 ESS 하나만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용도가 ESS만큼 커지려면 안전 인증과 모니터링 체계가 이동형·소형 환경에 맞게 더 정교해져야 한다는 지점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참고: [Kim & Chang] “사용후 배터리 산업 육성을 위한 법·제도·인프라 구축방안 발표” (https://www.kimchang.com/ko/insights/detail.kc?sch_section=4&idx=30348)
참고: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사용후 배터리’ 산업 키운다…정부, 육성 법안 연내 제정 추진”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931288)
참고: [인더스트리뉴스] “사용후 배터리 재사용 규정 정비… 전안법 일부개정안 10월부터 본격 시행” (https://www.industr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332)
참고: [e-정책] “다시 쓰는 전기차 배터리, R-ESS란?” (https://e-policy.or.kr/web/lay1/bbs/S1T10C49/B/13/view.do?article_seq=692)
참고: [한국일보] “폐배터리 ESS 연계 태양광 발전… 현대차, 실증사업 본격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11013100000113)
참고: [이투데이] “‘도시광산’ 문 열린다…사용후 배터리 시장 개화 채비 [기후부 첫 직제개편]” (https://www.etoday.co.kr/news/view/2608344)
참고: [법률신문] “사용후 배터리법의 주요 내용 및 시사점” (https://www.law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2505)
